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엘레니오 에레라 (문단 편집) === 스페인 시절 === 스타드 프랑수아에서 무관의 세월을 보낸 그는 1948년에 1부 리그로 막 승격된 레알 바야돌리드 감독을 맡아 팀을 승점 1점차로 잔류시키는 데 성공했다. 1948/49 시즌 당시의 라리가는 유독 치열했는데, 22점으로 12위로 시즌을 마무리한 바야돌리드는 그해 6위를 기록했던 [[아틀레틱 클루브]]와 승점 차가 2점에 불과했다. 이어 1949년 8월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감독으로 이적한 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진가를 보여줬다. 그는 1949-50 시즌과 1950-51 시즌에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2연패를 달성했고 코파 델레이에서도 1950년에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1952-53 시즌 중반 선수 영입 관련해서 이사진과 마찰을 빚은 에레라는 홧김에 팀을 이탈하고 말라가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말라가에서도 얼마 있지 않고 1953년 1월 데포르티보 라코루냐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후 잔여 시즌을 치른 에레라는 1953년 여름에 세비야 감독으로 부임하여 1956년까지 팀을 맡았다. 1957년 여름, 그는 이번에는 포르투갈의 CF 벨레넨세스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그곳에서 한 시즌을 치렀고 1958년에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와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1960년까지 2년간 있는 동안 1958-59 시즌에 레알 마드리드보다 승점 10점을 더 얻어 6년만에 우승을 달성하여 레알 마드리드의 연속 우승을 저지했고, 그해 코파 델 레이 준결승전에서도 치러진 엘 클라시코에서 마드리드 원정에서 4-2 완승, 캄 노우 안방에서 3-1로 이겨서 결승에 올라 그라나다를 꺾어 우승컵을 들었고, 1959-60 시즌에도 엘 클라시코에서 마드리드 원정 0-2 패배와 캄 노우 홈경기 3-1 완승을 거두어 우승을 달성했다. 또 에레라호는 당시 유럽을 제패하기도 했는데, 1958~1960년까지 치러진 인터-시티 페어스컵에서 바르사는 스위스의 [[FC 바젤]]에 합계 6-3, 이탈리아의 [[인테르]]에 합계 8-2, 유고슬라비아의 [[츠르베나 즈베즈다]]에 합계 4-2 대승을 거두었고, 잉글랜드의 [[버밍엄 시티]]와의 결승전에서도 4-1의 압승을 거두었다. 엘 클라시코에서도 막강했다. 에레라가 오기 전 바르사는 레알 마드리드에게 3연패를 당해왔었다. 지난 3차례 동안 바르사는 엘 클라시코마다 3번 다 한 골도 못 넣고 깨져왔던 것이다. 에레라는 1958년 10월 26일에 자신이 첫 경험한 엘 클라시코에서 첫 4-0 완승을 거둬 기대에 부응했다. 완벽한 수비로 레알 마드리드의 공격을 꽁꽁 묶었고, 에바리스투가 해트트릭으로 레알 마드리드의 뒤를 공략했다. 1959년 2월 15일 후반기 원정 경기에서 레알 마드리드가 경기 종료 11분 전 터진 결승골로 1-0 완승을 거두었는데, 재미있게도 당시 득점한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 이름도 에레라이다. 이 경기는 스페인 역사상 처음으로 TV로 생중계된 경기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2년 동안 이와 같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그가 잘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는데, 에레라는 당시 회장인 프란세스크 미로-산스(1918~1989)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어느 날 에레라는 미로-산스 회장에게 선수들을 함께 독려하자며 라커룸에 선수들을 불러다놓고 "회장님께서 내게 여러분이 오늘 경기에서 이기면 보너스를 주겠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하지만 회장은 보너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팀 재정 상태도 보너스를 줄 만한 상황이 아니어서 회장 입장에선 곤란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팬들과 선수단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에레라는 경기마다 선수들보다 30분 전에 경기장에 도착하고 난 뒤 그라운드에 나가 상대방 팬들을 도발해 경기장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이는 선수들이 경기 도중 보다 강한 투쟁심을 갖게 하려는 의도였으나 선수들은 매번 공공의 적이 되어 경기를 하는 것에 피로를 느꼈다. 바르사 팬들과 이사진들은 보다 간결하고 공격적인 축구를 바랐다. 즉, 에레라의 축구는 바르사의 방향과 매치가 안된 것이다. 결정적으로 선수들과 사이가 벌어진 것이 바로 '암페타민 파동'이다. 에레라는 경기 하루 전에 언제나 팀 선수들과 '티 타임'을 가졌다. 그러나 차를 마시고 부작용을 겪는 선수가 나타났다. 당시 선수인 엔릭 겐사나는 어느 날 집에서 어머니의 부름에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고, 이를 이상히 여겨 자신의 친구인 의사에게 성분 분석을 하면서 해당 차에 암페타민이 검출되었고, 겐사나가 이 사실을 선수들에게 알리자 에레라가 사실을 알고는 굉장히 분노했다.[* 사실 경기전에 암페타민 먹고 뛴 사례는 [[베른의 기적]]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약먹고 뛰었던 독일 대표팀부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긴 하는데, 중요한 점은 당시 독일 선수들도 알고 먹었는데 이 경우는 정말 언급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중 가장 반발한 이는 바로 [[라슬로 쿠발라]]였는데, 당시 쿠발라는 차 마시기를 거부하자 에레라 감독이 원정 경기에 쿠발라를 제외시키면서 이사진의 제재가 들어왔다. 이 와중에 1959-60 시즌 유러피언 컵 준결승에서 [[레알 마드리드]]와의 엘 클라시코가 펼쳐졌다. 이때 레알 마드리드의 [[페렌츠 푸스카스]]가 홈과 원정에서 혼자 4골을 몰아치는 바람에 바르사는 결승 진출에 실패했고, 이 패배가 명분이 되어 에레라는 1960년 6월 바르셀로나를 떠나야 했다. 어쨌건 간에 에레라는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라리가 2연패와 페어스컵 2연패, 그리고 코파델레이 우승을 일궈냈고, 60경기에서 46승 5무 9패를 기록, '''76.67%'''라는 높은 승률을 찍었다. 1980년에 그가 바르사에 돌아와 치른 총 2시즌의 기록이 없었다면 그는 바르사 역사상 최고 승률의 감독이 되었을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무려 182골을 몰아치고 54골을 방어하여 공수 양면에서 강한 팀을 만들어냈다. 스페인 시절의 에레라에 대해 얘기해 보자면, 그는 능력이 있는 감독이긴 하지만 지나친 자의식, 구단 이사진 및 스타 선수들과의 충돌로 오랜 기간 한 팀에 머물지 못했다. 그는 탁월한 전술적 혜안으로 '마법사'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동시에 그가 상대팀 감독과 선수, 팬은 물론이고 자신이 속한 팀의 회장과 선수들에 대한 심리전으로 인해 '심리학자' 내지는 '도발자'라는 수식어가 뒤따라다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